거성관 방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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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9시 뉴스 자료
MBC 뉴스데스크 자료
동아일보 보도자료
1. 개요[편집]
1991년 10월 17일 21시 50분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 농춘빌딩[1] 지하 1층에 있었던 나이트클럽 거성관에서 방화로 16명이 사망한 사건.
2. 사건 경위[편집]
범인 김정수(당시 29세)는 경북 금릉군(도농통합 후 현 김천시) 부항면에서 논 7마지기 정도의 벼농사를 짓는 농부로 당시 월 수입이 200만원을 넘는 제법 잘 살던 부농이었다고 한다.[2] 하지만 돈을 잘 벌었음에도 결혼에 실패한 미혼[3][4] 이었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살았다. 그러다 김정수는 사건 2개월 전인 1991년 8월에 친구와 함께 사건이 일어난 거성관에 갔었고, 술값 6만원을 선금으로 냈지만 종업원이 술을 3만원어치만 줘서 종업원과 다툰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1년 10월 17일, 다시 친구를 만나러 대구에 왔고 고향 친구 2명과 인근 불고기집에서 맥주 6병을 마신 후, 2차로 거성관에 갔다.
그러나 종업원들은 드레스 코드를 운운하며 옷차림이 엉망이라고 그의 출입을 저지(입뺀)하였다. 그는 수십만원의 현금을 보여주며 지금 옷차림이 엉망이지만 그래도 돈은 많다고 이야기했지만 종업원은 쫓아냈다. 그러자 그는 다른 술집에서 홀로 술을 마시다가 농부라서 무시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 결국 인근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산 후 클럽 뒷문으로 들어가 무대 위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 다음 도주했다.
3. 커진 희생[편집]
범인이 불을 붙이려는 순간 무대에서 전자오르간을 연주하던 사람이 그것을 목격했고, 그 사람이 재빨리 불이 났다고 알려 사람들의 피신을 시도했다. 그리고 화재도 7분만에 무사히 진화되었지만 16명이라는 엄청난 사망자가 나왔는데, 그 이유를 보면 지금 봐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처음 사람들이 탈출을 시작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당시 클럽 내의 전기시설이 모두 꺼져있는 상태였다. 그로 말미암아 어두운 지하에서 비상구를 찾지 못해, 혹은 환풍기로 화재 연기가 빠져나가지 못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 원인은 후에 밝혀지는데, 화재 당시 종업원이 화재를 전기 누전에 의한 화재로 오인하고 전원을 모두 차단해 전기시설이 전부 꺼졌던 것이다. 나름 빨리 대처한다고 뭔가를 했는데 화재 원인이 달라서 대참사가 된 케이스. 거기에다 회관 바닥에 깔린 양탄자가 타면서 유독가스를 배출했고, 그것도 모자라 손님들을 대피시켜야 할 종업원들은 소화기로 화재 진압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전부 먼저 도망쳤다.
그리고 손님들은 불이 난 것을 무대연출로 생각해 가볍게 넘겼으며, 뒤늦게 대피하려 할 때에는 15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1개뿐인 출입문에 몰려 있어 크게 혼잡을 빚었고, 설상가상으로 조명이 모두 꺼진 상태여서 피해자가 크게 늘었다.
그래도 당시 김진설이라는 소방관은 연기/가스 과다흡입으로 기관지에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20여명의 인명을 구조하였다. 이후 베테랑 소방관으로서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대구 지하철 참사, 대구 열차 추돌사고 등 대구지역에서의 대형참사 때마다 많은 인명을 구조하여 2011년 영웅소방관에 선정되기도 했고, 대구강서소방서[5] 기동지휘팀장으로 근무한다는 게 밝혀졌다.
4. 결과[편집]
당시 클럽에 있었던 사람 150여명 가운데 16명이 사망했고 1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검찰은 김정수에게 현주건조물방화치사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하였으나, 항소심에서 우발적인 범행이고 종업원의 과실로 피해가 커진 경우라며 이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하였다. 전원을 차단한 종업원에게는 중과실치사상죄를 적용하여 금고 2년에 집행유예 3년의 형사처벌을 내렸다.
사실 김정수 본인도 우발적이었고, 자신도 누가 본 것을 보고 놀라 달아나서 적어도 불은 끌테니 큰 피해는 없겠구나...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잡히면서 16명이나 죽었다는 말에 그도 깜짝 놀랐고 당시 방송에서 고개를 숙이면서 피해자 여러분들에게 죄송하다면서 본인도 이렇게 크게 피해가 날줄 몰랐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런 점이 받아들여져 무기징역이 된 듯하다. 현재 30년도 더 지나 가석방이 가능한 시점이지만, 알다시피 엄청난 인명피해를 낳아 가석방 통과가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전 재산도 보상금으로 다 나눠준 와중에 본인도 나이가 60이 넘어 거지 꼴로 나갈테니 가석방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없다. 만약 항소심에서도 김정수의 사형이 유지되고, 상고심까지 사형이 확정되었다면 94년, 95년, 97년도에 집행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기에 지금도 무기수로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어머니는 결국 충격 속에 세상을 떠났고 많은 재산도 스스로 보상금으로서 유족들에게 나눠줬다고. 오래전에 나온 온갖 강력범죄사건에 대한 책자에서 나오길, 김정수는 불교를 믿고 있으며 책쓴이와 인터뷰에서도 "그때 욱하는 마음으로 벌였는데, 사람이 봐서 그래도 큰 피해는 없겠다...내일 경찰 오면 가야겠지...이렇게 여겼는데 사람이 그리도 죽었는지 꿈에도 몰랐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어쩌자고 사람을 이리도 많이 죽이게 했니!' 라고 통곡할 때 그저 눈물만 나오고 유족들에게 죄송하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결국, 어머니는 오래 못가 시름시름 앓아 돌아가셨으니 내가 어머니까지 죽이게 한 셈이다. 죽은 사람들을 어찌할 수도 없으니....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참회할 뿐이다. "라면서 적어도 참회하고 안타까워했다.
5. 기타[편집]
사건이 일어난지 이틀이 지난 1991년 10월 19일 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두 사건이 사회에 불만을 품고 홧김에 저지른 전형적인 묻지마 범죄의 특성을 띠고 있어 충격을 주었다.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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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다이소 비산네거리점이 있는 건물로 외부 리모델링이 없어 당시나 지금이나 건물 외형은 비슷하다.[2] 1991년 기준으로 월 최저임금이 20만원 정도였고, 대기업 신입사원이 보통 월 50만원 가량에, 자리잡은 도시민들의 평균수입이 월 100만원 안팎이었다. 또한 최저임금만으로 200만원 넘게 버는 것이 2019년에 와서야 가능한 일이었다.[3] 당시만 해도 농촌 총각들이 돈도 잘 버는데도 이렇게 되는 게 워낙 많아 사회문제였다. 전원일기나 수사반장(홀어머니를 모시던 농촌 총각이 맞선으로 결혼했더니만 매춘부였다. 물론 속였던 것이지만 이 여자를 알아본 손님이 이름을 부른 탓에 모든 걸 알게 되어 어머니는 충격으로 죽고 그 총각은 눈이 돌아 아내를 몰래 낫으로 죽여버리고 이후 매춘 여성만 골라 죽이는 살인마가 되어버린다.)에서도 이런 게 소재로 나올 정도라 국제결혼 인식이 엄청나게 안 좋던 90년대 초반에 갓 중국과 수교하면서 한국에 오게 된 조선족 여성들과 농촌 총각들이 결혼해야 한다는 기사가 쏟아지며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게 얼마나 심했는지 당시 벼룩시장에서도 농촌총각 특선 구혼광고도 나왔는데 당당하게 90년 초에 연수입이 1억이 넘는데도 결혼하지 못한다고 나올 지경이었다. 심지어 애니메이션 <달려라 호돌이>에서도 농촌 총각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자들이 시골에 가는 거 싫다고 결혼하지 못하는 게 '굿바이 노총각'이란 제목으로 한 에피소드로 나올 정도였다. 이 에피소드도 무척 암울한데 홀어머니 모시고 농장일을 하는 총각이 나이가 33살이다. 벌이도 좋고 집도 좋은 집임에도 결혼하지 못하니 아쉬워하는데 맞선 자리는 시골은 싫다며 여자 쪽이 거부해 가버리기 일쑤이다. 그러다가 도회지 다방 라이브 방송 DJ인 어느 여자랑 어찌어찌 맺어지는 거 같더니만 그야말로 아씨발꿈이었다.[4] 이에 대해서는 단순한 시골 및 농촌 이미지만 요인이었던게 아니고, 농촌 인프라가 현재보다 지나치게 안 좋았던 요인이 크게 관계한다. 도시 인프라도 지금 도시보다 안 좋은 판에, 도시 농촌의 인프라격차는 지금보다 비교도 안되게 더 컸으니 농촌에서는 개인의 단순한 행정처리일도 곤란한 상황이 흔해 빠졌고,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의료서비스는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에, 특히 교통 요건이 너무 안 좋았다. 너무 많은 농촌지역이 외부로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려면 하루 1대 오는 버스라도 타려고 한참을 걸어나가야 했다. 게다가 시골 인심도 그때라고 좋은 적도 없고, 시골 치안은 더 엉망에 지역토호세력과 지역경찰과의 비리유착도 지금보다 훨씬 보편적인데다가 중앙정부가 제대로 단속할 의지도 없어서, 정당한 신고조차 안 받아주기 일쑤였다. 즉 시골에 시집가면 시부모나 남편에게 부당한 일을 당해도, 야반도주를 하지 않는한 친정으로 못 돌아가고 납치감금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경우가 흔해빠졌으니, 농부남편이 큰 돈을 벌건 말건 시골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시집가기 싫었던 것. 기초 인프라와 치안 행정 마인드가 없는 곳에서, 돈은 1억이건 2억이건 아무런 의미나 가치도 없었다.[5] 대구에 강서구는 없지만 강서소방서는 있다. 달서구 성서지구 및 달성군 다사읍, 하빈면을 담당한다.